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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누나!

꽃사미 2025. 7. 2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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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여서사(書士)

초등학교 4학년, 숨만 쉬어도 땀이 흐르던 대전의 한여름.
나는 중구청 옆 시립도서관의 방학 특별 독서캠프에 참여하고 있었다.
책 냄새가 스며든 조용한 공간, 그곳에는 햇살보다 더 따스한 미소를 지닌 20대의 여서사(女書士) 한 분이 계셨다.

어느 날, 무더위 속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숨이 가쁘던 나를 그녀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주었다.
그 손길은 시원한 바람보다도, 시냇물보다도 청량했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아마도 그것이 사춘기의 첫 문을 두드린 순간이었으리라.

그 여름 내내 그녀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챙겨주었다.
책을 권해주고, 글쓰기를 지도해주며, 부끄러워 말 못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고, 나는 그 시간들을 한없이 소중히 간직했다.
캠프 마지막 날, 내가 쓴 독후감이 시립도서관장상을 받았다.
트로피보다 더 빛나던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잘했어.”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책을 사랑하는 소년에서, 사람의 피부를 어루만지는 피부과 의사가 되어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어느 날, 진료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기척이 들어왔다.
흰 머리, 세월의 흔적이 깊이 새겨진 얼굴.
하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여름, 내 얼굴을 감싸주던 그분이었다.

이제는 70대 노인이 되어 보톡스와 레이저 시술을 받으러 오셨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때의 따스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그때처럼, 오늘도 제가 최선을 다해 드릴게요.”

정성스레 시술을 마친 뒤,
그분은 아무렇지 않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병원을 나섰다.
아마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분이 모르셔도, 나의 마음은 오래 전 그 여름날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오늘도 문득,
무더운 도서관 앞마당에 서 있던 소년을 떠올린다.
그리고, 소년의 얼굴을 감싸주던 그 손길의 온기를.
그 온기가 나를 자라게 했고,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손길이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환자 한분 한분 정성스레 진료하려 한다.

그 여름의 서사(書士), 당신이 제 마음에 남긴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한 편의 시(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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