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상식

사람을 먼저 믿는다는 것

꽃사미 2025. 11. 2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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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가 장비가 고요한 숨을 멈춘 날, 나는 다시 경영을 배웠다

피부과의 하루는 대체로 밝다. 피부가 조금 더 나아진 얼굴, 트러블이 누그러진 환자들의 안도, 그리고 직원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움직임.
그러나 어떤 날은, 그 밝음의 중간에서 조용한 균열이 생긴다.
그날도 그랬다.
온종일 환자들이 몰려 정신이 없던 오후, 기계실에서 ‘딱’ 하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웃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 소리는, 나의 심장 박동을 잠시 멈추게 할 만큼 묵직했다.

문을 열자마자, 직원 A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수천만 원이 넘어가는 피부 레이저 장비가 조용히 쓰러져 있었다.
평소 고요하게 빛을 내던 그 기계는 마치 시인을 잃은 펜처럼 침묵만 흘리고 있었다.

A는 울먹이며 말했다.
“원장님… 제가 부주의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책임지겠습니다.”
말끝이 떨리고, 시선이 바닥에서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장비보다 더 크게 부서져버린 사람처럼.

순간, 나 역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 허탈, 비용 계산, 예상 매출 손실, 일정 조정…
경영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현실적 계산들은 늘 빠르고 정확하다.
그러나 그 계산이 전부가 되면, 조직은 쉽게 차갑고 건조해진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계산기를 내려놓고, 사람을 바라보기로 했다.


■ 장비보다 더 소중한 것

고가의 장비는 돈으로 환산된다.
그러나 사람은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장, 한 사람의 가능성, 한 사람의 진심은 어떤 공식으로도 정리되지 않는다.

A는 누구보다 성실한 직원이었다.
일찍 오고 늦게 가며, 환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늘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필요한 곳을 찾아가 손을 보태고,
환자가 “고맙다”고 말하면 자기 일 아니라고 손사래 치던, 그런 사람.

혹시 그런 사람이 실수했다고, 하루 만에 해고해야 할까?
아니면 장비 수리비의 일부라도 물어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람경영’은 그런 방식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 묵묵히, 함께 책임지기로 했다

나는 조용히 A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장비는 고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쉽게 얻지 못합니다.
이번 일은 병원이 책임질게요. 우리, 같이 다시 해 봅시다.”

A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마치 꽉 잠가둔 감정의 밸브가 풀린 듯, 짧게 울음을 삼켰다.

나는 그날 이후, 병원의 공지판에 작은 문구 하나를 붙였다.

“사람이 먼저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중요한 건 책임과 성장이다.”

그 문구는 직원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가끔은 나 자신을 다시 붙잡는 말이 되기도 했다.


■ 시간이 흐르자, 실수는 경험이 되어 돌아왔다

며칠 뒤, 장비 수리 업체 직원이 와서 점검을 마쳤다.
다행히 완전 폐기 수준은 아니었고, 제법 큰 비용은 들었지만 복구는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동안 A는 더욱 신중해졌다.
기계 하나하나를 다루는 손길이 섬세해졌고,
동료들에게도 “안전 체크는 두 번, 세 번은 해야 해요”라고 먼저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실수는 그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장비가 고쳐진 날, A는 작은 메모를 내게 건넸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더 오래 일하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그 메모의 글씨는 떨려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는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메모를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마음이 흔들릴 때 꺼내 보려고.


■ 경영의 본질은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일

사업을 하다 보면, 숫자와 비용, 매출과 리스크가 우선순위로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병원은 결국 사람이 모여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운영자의 철학 또한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장비는 언젠가 낡고, 새 모델로 교체되며, 기술은 해마다 발전한다.
그러나 사람의 진심, 팀워크, 서로에 대한 신뢰는 그 어떤 신형 장비보다 강력한 경쟁력이다.

나는 과거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수없이 말해왔지만,
그날 비로소 그 말을 실천할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험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고, 우리의 진짜 철학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손실은 투자가 된다

장비 수리비는 분명 작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비용을 ‘손실’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사람 한 명을 잃지 않은 것,
팀 전체가 책임감과 신뢰를 새로 배우게 된 것,
그리고 병원 내부의 공기가 한층 더 따뜻해진 것.

이 모든 가치를 떠올리면, 그것은 손실이 아니라 투자에 가깝다.

장비는 고쳐졌고,
조직은 더 단단해졌고,
A는 여전히 환자에게 가장 먼저 웃는 직원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오늘도 사람을 믿는다

경영은 냉정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 냉정함 안에 따뜻함을 담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을 믿는 경영, 사람 때문에 성장하는 조직.
그 속에서 병원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삶의 한 조각이 된다.

고가의 장비가 쓰러졌던 그날,
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오늘도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인다.

“장비는 다시 살릴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한 번 놓치면 되돌리기 어렵다.”

그 믿음 하나로 병원을 운영해 나간다.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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