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스코틀랜드의 공기가 늘 그렇듯 쓸쓸하게 차갑던 그 시절, 나인웰스 병원으로 향하던 아침길은 언제나 잿빛이었다. 바람은 바다에서 흘러들어와 도시에 묻어둔 지난 계절의 냄새를 일깨우고, 병원 건물의 유리창은 닿을 수 없는 하늘을 담듯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 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의사라는 이름의 수련생으로 살아내고 있었고, 시간은 늘 아련한 목표와 무거운 책임 사이를 오갔다. 그 무채색의 나날 한복판에서, 한 사람의 미소가 내 삶의 색채를 바꾸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스웨덴에서 온 연수 동료였다. 금빛 머리칼은 햇살을 품은 듯 부드럽게 어깨 위에 내려앉았고, 눈동자는 북쪽 바다를 닮은 푸른 빛으로 깊었다. 마주 보았을 때마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말없이 건네는 질문을 느꼈다. “당신은 지금의 자신으로 충분한가, 그리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녀는 과장된 친절도, 요란한 웃음도 없었다. 다만 차분한 미소와 온화한 시선으로 우리 사이에 조용한 온기를 놓아두었다. 병동을 함께 걷고, 수술 대기실의 정적을 공유하고, 휴게실의 짧은 커피 한 잔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례하거나 성급하게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병원의 오래된 복도 창가에서 그녀와 마주 섰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 따뜻한 떨림을 인정했다. 바깥에는 스코틀랜드의 겨울빛이 은근히 번져 있었고, 기억할 수조차 없는 나날을 지나며 지쳐 있던 내 마음은 그 순간 낯선 평온에 잠겼다. 그녀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며 “여기에서의 시간은 우리를 오래 기억할까요?”라고 묻던 순간,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이 언젠가 인생의 어느 페이지를 비추는 불빛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은 늘 바람과 같은 숙명을 지닌다. 붙잡고 싶을수록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투명한 존재.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서로의 마음을 느꼈지만, 각자의 길과 사명, 돌아가야 할 자리, 감당해야 할 현실이 우리 사이에 조용히 벽을 세우고 있었다. 주변 동료들은 농담처럼, 또 어쩐지 진심처럼 우리를 응원했다. 언어와 국적의 차이를 넘어 이어질 사랑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냐며, 한 시대의 낭만처럼 기억될 인연이라며. 하지만 응원과 격려도 결국 운명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 만큼 성숙한 사람이었다.
결국 헤어짐의 순간은 그렇게 조용히 다가왔다. 공항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눈부신 대신 서늘하게 투명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지만, 마음은 그보다 훨씬 깊은 말을 말없이 삼키고 있었다.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용기 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런 가정법의 문장은 끝내 입술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었지만, 그 포옹은 약속이 아닌 작별의 온기였다. 그녀의 향기, 손끝의 따스함, 잠시 머물렀다 흩어지던 금빛 머리카락의 흔들림까지,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시간의 봉인으로 잠겼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스치는 바람과 한 장의 사진, 낯선 도시의 풍경, 혹은 병원 복도의 은빛 조명 하나만으로도 그 시절이 되살아난다면, 그것은 잊힘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 환자의 심장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상 속에서도 문득 그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것은 후회가 아니라, 내가 한때 뜨겁게 흔들렸던 인간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증거였다.
못 이룬 사랑이라고 해서 모두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이루지 못했기에 더욱 아름다운 서사가 되는 사랑도 있다. 실현된 사랑이 현실 속에서 무뎌지고 변형될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은 기억 속에서 영원히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는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왜 잡지 않았느냐”고 묻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우리가 붙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존중했기 때문에 놓아야만 했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책임과 꿈, 그리고 각자의 길을 인정한 성숙한 체념이었다.
시간이 더 흘러, 인생의 계단을 몇 번이나 돌아 내려오듯 뒤돌아볼 때, 그녀와의 기억은 여전히 파란 빛으로 남아 있다. 찬란하지만 차분하고, 아프지만 고마운 빛. 그 빛 덕분에 나는 한 인간으로서 더 깊어졌고, 한 의사로서도 더 따뜻해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과거는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내 것이 아니었던 사실조차, 이제는 슬픔이 아니라 은은한 향처럼 마음을 적시는 추억일 뿐이다.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만, 그때보다 조금 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그녀에게 건네고 싶을 뿐. “당신 덕분에 이곳의 겨울이 덜 추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 속에서 나 역시 잠시 머물렀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녀의 삶 어딘가에서도 내가 작은 온기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불현듯 스코틀랜드의 바람이 마음을 스쳐 가듯 추억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이루지 못했기에 더욱 빛나는 사랑, 잡지 못했기에 오히려 온전히 마음속에 남은 사랑. 금발의 그녀, 파란 눈동자의 그 아가씨, 그리고 그 시절의 나.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지나간 손님이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내 삶의 어딘가에서 빛을 잃지 않은 채 조용히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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